앨런튜링(Alan Turing) mathematic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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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연필로 컴퓨터 역사를 그린 앨런튜링(Alan Turing)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컴퓨터역사는 애니악(ENIAC)이 등장한 1946215일 시작되었다는 게 일반적이다. 공식적인 데뷔 날짜는 이처럼 2차대전이 끝난 얼마 뒤이지만 이론적 발판은 1930년대 쌓였다.


계산기의 아버지찰스 배비지가 세상을 떠난 65년 뒤인 1936. 영국수학자 앨런튜링이 내놓은 튜링머신이론은 복잡한 계산을 하나씩 처리하는 오늘날의 컴퓨터를 예언했다.



Alan Turing (Alan Mathison Turing)


출생사망 : 1912. 06. 23 ~ 1954.06.07.

 


30년대 컴퓨터 이론의 선구자

 

앨런튜링은 1912623일 런던교외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줄리어스 튜링은 인도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튜링은 어린시절 대부분을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했다. 6살 무렵에는 세인트 미카엘스 예비학교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위로 형이 있긴 했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두 형제는 런던 패링턴에서 외롭게 자랐다. 형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1926년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접고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식구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Alan Turing as a child.


앨런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다. 말을 빨리 배우고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았다. 3살 때부터 새로운 단어를 기막히게 암기해내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아들의 천재성을 발견했다. 8살 때는 과학에 깊은 괌심을 갖기 시작해 지하실에서 색다른 실험에 빠져들곤 했다. 12살 무렵에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쓴적이 있다.


[ “저는 자연의 평범한 것들로부터 어떤 것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것을 에너지를 가장 적게 들이고 말입니다.” ]

 

그의 지나친 호기심은 어머니에게는 오히려 근심거리였다. 어린 아들이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13살 때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셔본 스쿨에 들어갔지만 부모의 염려와는 달리 그럭저럭 생활을 잘 해나갔다. 비록 학교 교장은 마치 자신이 고독한 과학자가 된 것처럼 매시간 집중하고 있다는 평가를 남겼지만.


14살 때는 수업과정을 모두 이수하지 않고도 미적분 용어를 이해했고 암산 능력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 났다. 그는 여느 천재들과 달리 대단히 활동적이었고 달리기에 소질이 많았다. 친구는 많지 않았지만 1년 선배인 크리스토퍼 모콤과 친하게 지냈다. 똑똑하고 매력적인 크리스토퍼가 19301월 갑작스럽게 죽기 전까지 둘의 우정은 각별했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죽음이라는 심오한 고민이 스스로를 괴롭혔다. 크리스토퍼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분리되고 합쳐지는가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기도 했다. 마음의 상처는 깊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치료되었다.

 

19살이던 1931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수학과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케임브리지 트리니 칼리지의 장학생 선발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진 뒤였다.

대학시절 자전거 기록을 잰다며 허리에 자명종을 차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분방한 학생이었다. 커다란 키에 스포츠라면 무엇이든 좋아했고 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바이올린을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악기를 다루는 솜씨는 과학적인 재능만큼 뛰어나지 않았다.



 

Culture clash: the soft machine in a hard place.


30년대 걸작 튜닝머신이론 펴내

 

1934년 킹스 칼리지를 졸업한 뒤 수학과 연구생을 거쳐 193610월부터는 미국 프런스턴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프런스턴 대학은 아인슈타인 박사를 비롯해 수많은 과학자들로 명성이 드높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의 수학과는 기대할 만큼 훌륭하다.”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친구들과는 잘 지내지 못했다. 지적수준이 비슷하지 않으면 만남을 꺼렸고 말을 더듬는 습관 때문에 폭넓은 사교를 피했다. 옷차림에는 별관심이 없었고 피를 보면 기절할까봐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는 꽃가루 알레르기를 걱정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1936년 튜링은 튜링머신으로 알려진 이론을 세웠다. 런던수학협회지에 발표한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한 연구-결정문제의 적용과 관련해라는 글에서 미래에 펼쳐질 컴퓨터의 이론적 세계를 파헤쳤다. 튜링 머신은 실제 기계가 아니라 종이와 연필로 그린 설계도였지만 연산이나 계산이라는 개념으로 오늘날의 컴퓨터를 정확히 그려냈다. 튜링 머신은 필름처럼 네모난 칸으로 나뉜 종이테이프를 모터의 힘으로 한 칸씩 앞뒤로 돌리는 아주 간단한 구조였다. 이 기계는 한 번에 다음 4가지 동작 중 하나만 처리한다.

 

칸을 하나 앞으로 보내거나 뒤로 되돌린다.

테이프를 멈추고 기호를 지운다.

칸에 0이나 1을 적는다.

기계를 세운다.

 

튜링 머신은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1에서 6까지 적힌 시계 문자판 같은 것이 있어서 프로그램의 내용을 알려주고 작업이 끝나면 순서에 따라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덧셈과 뺄셈, 곱셈과 나눗셈도 계산하고 연산 순서만 정하면 어떤 문제도 척척 풀어낸다. 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바로 그 해, 저 너머 영국의 앨런 튜링은 어떤 계산이나 논리적인 조작도 알고리즘만으로 자동화할 수 있다면서 컴퓨터 이론을 이끌어냈다.

 

튜링 머신은 계산에 뺏기는 많은 시간을 기계로 대신하자는 당시의 여론에 힘입어 학계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클로드 새논이 발표한 릴레이와 스위치 회로의 기호적 해석과 함께 30년대 가장 뛰어난 이론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새논의 논문은 복잡한 수학 계산을 and, or, not 등의 연속된 회로로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튜링 머신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7년 영국에서 여름을 보내고 프록터사의 장학생 신분으로 프린스턴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튜링 머신이론을 내놓은 2년 뒤인 19385서수(序數)를 기초로 한 논리시스템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6살의 일이다. 이 논문은 헝가리 태생의 수학자 존 폰 노이만교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훗날 프로그램 내장 컴퓨터로 이름을 날린 존 폰 노이만 교수는 튜링을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거절 당했다. 비록 두 사람이 함께 일하지는 못했지만 튜링의 이론은 폰 노이만이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존 폰 노이만과 짧은 인연




1938년 여름, 영국으로 돌아온 튜링은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했지만 뜻하지 않은 ‘암호’ 연구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2차 대전의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는 엄청난 이야기가 그를 중심으로 숨 막히게 펼쳐졌다. 암호 기술은 1차 대전을 치르면서 중요해졌고 2차 대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핵심 전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때는 특별한 장비 없이 무선 통신으로 연락을 하던 때여서 쉽게 도청을 당할 수 있었다. 독일은 암호 기술에 온 힘을 쏟아 2차 대전에 앞서 ‘에니그마’(Enigma)라는 암호기를 만들어 냈다. 크기 30×30×15cm에 무게 30kg의 에니그마는 독일군 사령부와 각 전선의 부대는 물론 대서양의 U보트 함대를 연결시켰다. 독일군은 자신들의 교신 내용을 연합군이 도청하더라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도록 에니그마로 암호화했다.


‘수수께끼’라는 뜻의 에니그마는 1919년 네덜란드의 후고 알렉산더 코흐가 설계했고, 1927년 독일 기술자 아르투르 세르비우스가 특허권을 얻어 기능을 더한 것을 1930년대 독일군이 전선에서 쓰기 시작했다. 에니그마 암호의 비밀은 회전자(rotor)에 있었다. 3개의 회전자를 예로 들면, 각 회전자는 26개의 알파벳 문자열을 순서대로 가진다. 타자기로 문자를 치면 첫 번째 회전자가 회전하고, 1회전이 끝나면 두 번째 회전자가 한 칸 움직인다. 그리고 두 번째 회전자가 한 바퀴 돌면 세 번째 회전자가 한 칸 움직인다.


3개의 회전자를 이용하면 26×26×26=17,576개의 조합이 나온다. 회전자 3개의 위치는 물론 회전자의 위에 표시된 알파벳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서 조합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기본 조합에 회전자 위치에 따른 경우의 수 6, 알파벳 위치에 따른 조합의 수 26×26×26을 곱하면 1,853,494,656개가 된다. 여기에 회전자 뒤의 반사체를 이용한 경우의 수 1,305,093,289,500을 곱하면 조합은 무려 4,920,000,000,000,000,000,000개에 이른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숫자다. 독일군은 2차 대전이 터진 뒤 회전자의 설정을 8시간마다 교체하고 전송규칙도 때때로 바꿔 보안을 지켰다. 아무도 이 암호를 풀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에니그마의 존재를 안 나라는 폴란드였다. 독일이 에니그마를 개발하기 시작하자 폴란드는 해독 팀을 구성했다. 하지만 별 성과 없이 3~4년이 흘렀고 수학자 르옙스키가 합류하면서 성과를 얻기 시작했다. 에니그마는 기계적으로는 손색이 없었지만 병사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 비밀의 문이 열렸다. 암호병은 전문을 암호화해서 보내기 전 에니그마의 초기설정 값(예를 들면 ‘tintin’)을 두 번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암호병들은 ‘한번 쓴 것을 다시 이용하지 마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기기 일쑤였고 아주 간단한 문자(예를 들면, ‘aaaaaa’)를 썼다.


때마침 폴란드는 프랑스로부터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독일군이 병사들에게 나눠준 에니그마의 설명서였다. 이에 힘입은 르옙스키 팀은 통신문의 처음 6자는 3자가 2번 반복된다는 사실과 회전자의 초기 상태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침내 폴란드는 에니그마의 비밀을 파헤쳤고 독일군의 암호를 20분 안에 풀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1937년 말 암호 체계를 바꾸더니 1938년 12월에는 회전자 수를 3개에서 5개, 그리고 1940년 5월에는 8개로 늘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폴란드는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인 bomba를 만들긴 했지만 해독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콜로서스’로 전세 역전시켜


그 사이 에니그마에 대한 정보는 영국으로 흘러갔다. 독일이 침공하기 6주 전인 1939년 6월25일, 폴란드 첩보부대는 바르샤바 근교의 몰로코프-피리 숲속 지하실에서 영국 첩보원들에게 에니그마와 설명서를 넘겨줬다. 영국 첩보원들은 에니그마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음날 자정이 되기 전 영국 본토로 보냈다. 1939년 2차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해 런던 근교 블레츨리 파크의 농촌 주택에 비밀기지를 세우고 암호해독작전 ‘울트라’를 시작했다. 비밀기지에는 영국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앨런 튜링도 포함되었다.



<앨런튜링이 당시 독일군의 암호문서제작 및 전송기인 에니그마를 어떻게 해독했는지를 쓴 문서>


앨런 튜링은 철옹성 같은 에니그마에도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서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예를 들어, 독일 폭격기가 출동하면 그에 해당하는 암호의 일부분을 해독했다. 이를 ‘크립’(crib)이라고 했는데, 독일군 통신문에 크립이 많이 생기도록 유도한 뒤 조금씩 수수께끼를 풀어나갔다. 전쟁 중에 노르웨이, 프랑스, 이스라엘 등에서 에니그마와 코드 일부를 입수하면서 해독 작업은 속도가 붙었다. 1940년 앨런 튜링은 에니그마의 암호화 과정을 역추적하는 ‘봄베’(bombe)라는 해독기를 만들었다. 봄베라는 이름은 봄바를 만든 폴란드 과학자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에니그마의 회전판을 흉내 낸 바퀴들로 이뤄진 봄베는 자료를 기억할 수 없어서 도청한 에니그마의 신호와 비교할 수 없었다. 이를 개선한 게 1943년 12월 선보인 ‘콜로서스’(colossus)다. 2천400개의 진공관을 갖춘 높이 3미터의 폭탄은 초당 5천자의 암호문이 새겨진 종이테이프를 읽으면서 에니그마 코드와 비교해 같으면 멈춰 섰다. 수를 세거나 비교하고 연산까지 한다는 점에서 콜로서스는 1946년 선보인 ‘에니악’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앨런 튜링이 독일군의 암호 해독을 위해 사용했던 컴퓨터 봄베>


영국 정부는 콜로서스가 언제쯤 해독을 끝내고 결과를 내놓을지 몰랐기 때문에 비밀 장소에 안전하게 모셔놓고(?) 여자들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보안을 지켰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폭탄이 멈추면 과학자들을 부르는 게 전부였다. 1943년 이후 폭탄은 에니그마 암호를 완전히 해독할 만큼 발전했다. 독일은 자신들의 정보가 새는 이유를 스파이 짓으로 여겼을 뿐 에니그마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2차 대전은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앨런튜링은 암호 해독으로 큰 공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될 무렵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독일군이 영국을 침공하자 튜링은 자신의 재산을 은덩어리로 바꿔 근무지 근처의 숲속 두 곳에 나눠 묻었다. 이때 허리를 크게 다쳤을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장소를 찾지 못해 많은 재산을 날리고 말았다.


1945년 6월, 독일이 항복하자 튜링은 국립물리연구소(NPL) 수학부의 위촉을 받아 자동계산기 ‘에이스’(ACE)를 만들기 시작했다. 에이스는 20만 비트 이상의 메모리를 갖고 미국의 에니악보다 10배 이상 빠르게 구상되었다. 46년 초까지 튜링은 설계를 거의 마쳤다. 하지만 당시 물리연구소는 튜링이 욕심내는 대형 컴퓨터를 만들기에 시설이 턱없이 비좁았다. 그래서 다른 장소를 찾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장소가 마땅치 않은데다 연구소의 동료들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튜링은 연구소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인공지능 이론의 선구자


이 무렵 튜링은 뛰어난 달리기 선수로 이름을 날리면서 런던 남서 지방의 월튼 클럽에서 활동했다. 회원들은 튜링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높이 샀다. 누군가 “왜 그렇게 자신을 혹사할 정도로 운동을 하냐”고 묻자 튜링은 “내 직업은 너무나 스트레스가 많다. 이를 털어내기 위해서 힘들게 뛰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1947년 8월 열린 영국 아마추어 육상 선수권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46분3초의 우수한 성적으로 5위에 올랐다.



Alan Turing finishing a race, 1946


이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1948년 런던 올림픽 우승자보다 겨우 11분 뒤진 놀라운 기록이었다. 48년 열린 크로스컨트리 경기에서는 런던 올림픽 은메달 리스트인 탐 리차드보다 앞서 들어왔다. 어쩌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냈을지 모르지만 연습을 하다가 그만 허리 부상을 당해 꿈을 접어야 했다.


1948년 5월 튜링은 에이스 프로젝트가 시작도 되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물리연구소를 떠나 맨체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이스는 튜링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5년이 지난 50년 5월 겨우 완성되었지만 애초 계획보다 턱없이 작은 규모였다. 이에 앞선 47년 연구소와 마찰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 튜링은 유급 휴가를 얻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잠시 머리를 식혔다. 이때 그는 ‘지능기계’라는 논문을 펴내면서 “컴퓨터가 지능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인공지능에 대한 궁금증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튜링은 48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페란티 마크 1’을 개발하는 한편 ‘계산 기계와 지능’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마인드’(Mind)라는 연구저널에 발표된 이 글에서 지능과 사고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를 내리고 싶었다. “같은 질문에 대한 컴퓨터와 인간의 대답이 차이가 없다면 컴퓨터는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능기계’라는 논문에 이어 인공지능에 한발 더 다가선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본질적인 질문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Can machines think?)였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튜링 테스트’라고도 부르는 ‘모방게임’(imitation game)을 생각해냈다. 각기 다른 방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질문자를 집어넣고 게임은 시작된다. 질문자는 다른 두 방에 있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른 채 스무 고개 식으로 질문을 던져서 답을 알아낸다. 남녀는 목소리 대신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써서 답한다. 시험이 어느 정도 이뤄지면 남녀 중의 한 사람을 컴퓨터로 바꾼다. 이제 질문자는 어느 쪽이 인간인지, 기계인지를 알아낸다. 튜링은 “이 게임에서 질문자가 사람과 기계를 구별하지 못하면, 기계는 생각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면서 “50년 안에 컴퓨터는 모방 게임에서 들키지 않을 정도로 똑똑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예상대로 8,90년대를 거치면서 인공지능은 과학자들의 신선한 주제로 떠올랐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네트워크 게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용되고 있다. 체스 세계 챔피언인 블라디미르 크람니크가 인공지능 컴퓨터 ‘딥 프리츠’와 체스 대결을 벌였던 세계적인 이벤트는 인공지능이 얼마나 성숙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로봇과 대화를 나누는 메신저 서비스도 생겼다. 지난 2000년 인공지능 대화 프로그램 경연대회인 ‘뢰브너’(Loebner Prize)에서는 ‘앨리스’(ALICE)라는 프로그램이 우승했다. 


컴 퓨터와 인공지능이라는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앨런 튜링의 사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1951년 크리스마스 무렵 아놀드 머레이라는 청년과 사귀었다. 이듬해 초 맨체스터 남쪽 15km 지점에 있던 그의 집에 강도가 들었지만 튜링은 범인을 알면서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그의 애인이 공범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에는 동성애가 위법적인 행위였다. 52년 초 앨런 튜링은 외설죄로 기소되었다.

동성애로 1년 간 감호생활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동성애는 2차 대전 중 또는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때 튜링의 서기로 일했던 I.J. 굿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일찍 알려졌더라면 전쟁 중에 에니그마의 미스터리를 벗길 수 없었고 결국 영국에게는 큰 손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성애를 형사 처벌했던 당시 분위기에서 튜링의 뛰어난 재주는 영국 정부에 큰 고민을 안겨주었을 게 뻔했다. 동료의 말대로 “동성애가 뒤늦게 밝혀진 것은 영국 정부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외설죄로 체포된 튜링은 징역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 업적 때문에 1년 감호처분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성적 충동을 억제하는 여성 호르몬을 장기간 복용했다. 이 때문에 얼마 뒤부터 무기력증에 빠졌고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부작용에 시달렸다. 1년 감호가 끝나자 화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젊어서부터 연구를 게임으로 풀었던 경력답게 이번에도 ‘무인도 게임’을 만들었지만 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했다. 문제를 제 시간에 풀지 못하면 독약이 자기 입으로 들어가도록 한 장치에 스스로를 내던진 것은 피폐해진 삶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1954년 6월7일, 새벽 청소를 하던 청소부는 싸늘하게 식은 튜링의 시체를 발견했다. 42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옆에는 반쯤 먹은 사과가 뒹굴고 있었다. 경찰은 시신과 사과에서 발견된 청산가리를 근거로 자살로 처리했다. 20대에 컴퓨터 이론의 뿌리가 되는 ‘튜링 머신’을 발표하고, 2차 대전 중에는 암호해독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쟁 뒤에는 인공지능 이론을 밝힌 영국의 천재는 그렇게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튜링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면서 재수사를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사라 튜링은 슬픔을 딛고 일어서 1969년 아들의 전기를 펴냈다. 어머니는 불행한 튜링의 인생이 어린 시절 외롭게 자란 탓은 아닌지 미안해하면서 이렇게 썼다.


“1921년 여름에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앨런이 너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제나 활발하고 누구와도 친구가 되곤 했던 아이가 비사교적이고 침울하게 변했습니다.”


아이를 예비학교에 맡기고 돌아오는 대목에서는 피 끓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예비학교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앨런이 손을 크게 흔들며 우리가 탄 택시를 쫓아 달려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자식을 떼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부모 슬하에서 행복하게 자라야 할 나이에 형과 둘이서 외롭게 컸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라 튜링은 아들의 불행한 운명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것이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다. 늙은 어머니가 가슴에 묻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전기를 펴내는 일이었다.


“이 짧은 전기가 그의 업적을 밝혀 불후의 업적으로 남는 데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지식과 진리의 추구에 열심히 몰두할 수 있었던 행복한 생애에 감사하기 위해 나는 이 전기를 썼습니다.”




Alan Turing with Apple


* The alan Turing Year



Alan Mathison Turing


그 가 세상을 등진 12년 뒤 세계적인 컴퓨터학회인 ACM(Association for Computer Machinery)은 그의 업적을 기리는 ‘튜링상’을 제정해 해마다 컴퓨팅 분야에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이 상은 컴퓨터의 노벨상으로 불릴 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 2001년 6월23일에는 맨체스터 대학 근처의 색빌 공원에 앨런 튜링의 동상이 세워졌다.


* Famous Scientists As Children Photos

- Charles Darwin
- Marie Curie
- Stephen Hawking
- Albert Einsten
- Thomas Edison
- John Von Neumann
- J Robert Oppenheimer
- Alan T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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