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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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2013년 1월 5일 오전 0시42분에 사망했다.

여기서 범 서방파는 흔히 '김서방, 이서방' 하는 그런걸로 쓰이는 '범서방'이 아니고 凡 서방파의 의미다. 지금은 명칭이 변했지만 옛날 광주에는 '서방면'이라는 곳이 있었다. 김태촌과 그 똘마니들은 그곳 출신이었기 때문에 조직이름을 경찰이 범 서방파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한 김태촌은 어떻게 광주에서 놀다가 서울로 와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인가?

1. 김태촌의 등장

원래 김태촌은 광주에서 흔히 좀 주먹 쓴다는 건달이었다. 소위 요즘 애들 일진 처럼 학창시절부터 불량서클을 모아서 쌈박질하고 다니던 그런 그룹이었다. 여러 기사에 의하면 그 시절 이미 광주의 학생일진 그룹들을 이미 평정했을 정도로 싸움실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 칼부림을 잘해서 젊은애들중에 잘나가는 애 중 하나였다.


칼부림에 대해서 원래 조양은이 사보이 호텔에서 써서 회칼이 주먹계에 번젔다는 말이 있는데 다 구라고..사보이 호텔에선 칼은 쓰이지도 않았고 원래 연장은 그 이전 시기 김두한 - 이정재 - 이화룡 - 정팔 이런 시기 때부터 쓰이는 거였다. 그러니 굳이 김태촌이 쓴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회칼'을 쓴다는건 좀 특이했다. (그전까지 연장은 단도나 낫,손도끼 이런 종류였음)


아무튼, 1970년대로 들어가서.. 광주에서 유명한 조폭으론 '송태준' 이란 사람이 있다. 민주당 의원들과도 친분이 깊었던 원로 조폭이었는데 이 사람이 1973년도 쯤에 서울과 광주를 오가면서 사업을 했다. 김태촌은 이 사람을 모시며 같이 서울과 광주를 오가는 중이었다.

송태준 밑에 "박영장","정학모","박종선" 이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김태촌의 직계 형님 뻘이었다.



(나중에 박종선은 자서전도 냈다. 깡패들이 드글거리는 태권도 협회 고문도 하고 씨름도 관련하고 하여간 이 사람도 나름 유명한 사람이다.) 

* 경우에 따라선 박종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2. 당시 서울의 건달 세력들

한편 당시 서울의 조폭 판도는 소위 50~60년대를 풍미하던 3대 패밀리 (김두한-심종현의 종로파 , 이화룡 - 정팔의 명동파, 이정재-임화수의 동대문 사단)의 구도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야인시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종로+명동 vs 동대문 이렇게 싸우다가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명동파가 무너지고 동대문이 서울을 일통했는데,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5.16 혁명으로 박정희의 깡패 소탕으로 동대문 사단의 이정재 - 임화수가 사형당하고 동대문사단은 둘로 정종원의 동대문파 와 유지광의 이천파로 쪼개지게 된다.



(사형장에서의 임화수)



(이정재)



(목숨건져 이천으로 낙향하게 되는 유지광 : 이정재 사돈)



(수원의 전국구로 통하는 최창식과 유지광)



(왼쪽이 오따 정종원, 오른쪽이 작고한 천안곰 조일환 -> 이정재 후계자와 김두한 후계자)

그 이후 감옥에서 나와 전화위복으로 동대문이 무너저 빈 서울의 주먹패권은 사실상 이화룡 - 정팔의 명동파가 접수하게 된다. 이화룡은 영화 사업을 한다고 은퇴하게 되고 정팔의 오른팔이었던 '신상사' 신상현이 조직을 물려받아 소위 말해서 "신상사파"를 열게 된다.



(현존 국내 전국구 건달 중 최상위에 위치하는 '신상사' 신상현 - 정팔의 직계다.)
*야인시대에선 '오상사'라는 가명으로 나오기도 했음



(가운데가 신상현, 왼쪽이 조일환)



(대충 신상사의 위상이 어느정도냐면 김두한 후계자로 전국구로 통했던 故조일환씨가 

행사에 참석한 신상사에게 깍듯이 인사하는걸로도 알 수 있다.)



3. 운명의 사보이 호텔 사건

위에 설명한 송태준은 신상사와 가깝게 지내면서 서울의 호남건달의 대부 노릇을 하게 된다. 

근데 70년대 중반은 소위 박정희의 영향으로 지방사람들이 서울로 우글우글 몰려 오게 되는 시기였다. 

특히 오늘날 설라디언의 주축을 이루게 되는 호남인들이 서울로 많이 몰려오던 시기였다.
이때 쯤에 다른 호남 지역들의(특히 순천) 깡패들도 서울에 몰려와서 이리저리 장사를 하고 세력권을 넓히면서 서식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전라도에서 올라와서 서울 무교동에 자리를 잡은 오종철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조양은의 형님이자 그 유명한 사보이 호텔 사건의 주역이었다.



(범호남파의 두목이었던 오종철. 박종선등과는 친분이 있었고 송태준과 함께 서울의 호남건달의 대부역활을 했었다.)


서울에 호남 건달들이 몰려오면서 기존의 터를 구축하고 있었던 신상사파와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70년대 서울이야 강남은 아직 뻘밭 투성이었고 강북 사대문안이 '진정한 서울' 로 소위 돈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유흥가와 시장들을 장악할려고 여러 조직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70년대 강남의 전경.. 뻘밭에 아파트만 덩그런히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오종철의 친구였던 이 모씨가 신상사파 조직원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반죽음 당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권 문제로 항의하려 갔다가 오히려 개 패듯 맞고 온것. 이에 격분한 오종철은 호남파의 정학모와 대구의 조창조등과 상의한 끝에 이 문제에 대해 전면 보복하기로 결정한다.



(대구의 전국구 건달로 통하는 조창조- 시라소니와 같은 독고다이 싸움의 귀재였다고 한다.)

여기서 설이 갈리는데 김태촌은 조창조, 정학모, 오종철이 합의해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고 하였고 다른 기사로는 조창조는 깨끗이 10 대 10 주먹 대결로 승부를 보자고 했지만 다른 호남건달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로서 오종철은 훗날 김태촌,이동재와 함께 신 3대 패밀리라 불리게 된 조양은에게 이번 습격의 행동대장을 맡게 하였다.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 씨)

'조양은' 은 '김태촌' 보단 일찍 서울로 상경하여 나름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가 오종철 밑에 들어가서 그를 형님으로 모시며 행동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조양은 자서전에 보면 이때 김두한과도 만나서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영화 '보스' 장면 中>
(조양은이 직접 출연하여 찍은 영화 보스의 한장면 - 사보이 호텔 습격사건을 그렸다.)

아무튼 그렇게 공격조가 편성되어 조양은은 이 모씨를 구타한 신상사의 매제 김수일이란 사람을 제끼고 노현구는 신상사를 김철은 다른 사람을 까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한다.


운명의 1975년 1월 1일

새해 신년축하를 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명동 신상사파와 신상사와 친했던 송태준 계열의 호남건달들이 사보이 호텔 연회장에 모두 모이게 된다. 신상사 신상현을 비롯해서 오른팔 구달홍, 정점수, 정경식, 김수일 등등이 모두 모인것이 확인되자 결국 작전은 실행되었다.


조양은을 비롯한 오종철 계열의 조폭들은 신상사의 매제 김수일을 습격하여 반죽음을 만들고 다른 선배들, 특히 송태준 계열의 호남선배들까지 싸잡아서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그 중엔 위에 설명한 번개 박종선도 있었다.

(다만 오종철은 같은 호남식구는 보호해주라고 했다고 하는데 지켜지진 않았다. - 사실인지도 명확치 않다. 사실 호남 건달들 가운데서도 서로간에 알력이 심했다. 정학모는 송태준 동생이었지만 박종선과는 사이가 안좋았던 것 같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여기선 절대 회칼이 쓰이지 않았다. 흔히 웹상에 돌아다니는 글들을 보면 이때 신상사가 칼침을 맞고 은퇴했다는 생구라가 있는데 90년대 중반 월간조선에서 오보를 내서 그런 이야기가 퍼젔다. 또 명동 신상사파가 갑자기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신상사파는 서북청년단 계열의 이북출신들이 많았고 이들은 한국전쟁도 겪고 50~60년대 동대문과 치열한 전쟁도 했었는데 겨우 이런일에 무너질 정도의 허약한 조직은 아니었다. 사보이 호텔 사건을 기점으로 호남세력이 서울을 장악했다 이런 오보가 많은데 구라니 믿지 말자.


아무튼,,, 당시 신상사는 화장실에 가있었기 때문에 험한꼴을 보지 않았다. 다만 매제 김수일 씨를 비롯해서 여러 동생들이 다치긴 하였다. 작전에 성공한 조양은과 행동대는 잽싸게 퇴각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사보이 호텔 사건으로 세간에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4. 복수와 김태촌의 픽업

죽은 사람도 없고 두목인 신상사도 다치지 않고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이 건달은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종자들이라.. 

개망신당해 구겨진 체면은 피해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결국 당장 복수를 하고 싶은데 문제는 당시 시국이었다. 

바로 박정희의 서슬퍼런 유신정국이었던 것.

대규모 보복은 꿈꾸기 힘들고 직접 나서는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고심한끝에 신상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 오랑캐로 오랑캐를 작살낸다.] 라는 전략을 쓰게 되고 같이 피해를 입은 박종선에게 쓸만한 애들이 없겠냐고 묻기에 이른다. 같은 호남 애들을 동원해서 호남 애들을 제압함으로서 손안대고 코풀려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신상사 신상현의 모습)

이리하여 번개 박종선에 이끌려 김태촌이 신상사에게 소개 받게 되고 사보이 호텔의 복수극으로 서울바닥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신상사와의 만남 이후 오기준, 박종선 같은 호남 선배들로부터 오더가 내려젔다. 



(왼쪽이 번개 박종선이다. 박종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목표는 두 놈. 바로 오종철과 조양은이었다.



(이후 필생의 라이벌 관계가 된 김태촌과 조양은)



(공격의 주 목표였던 오종철)

1.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 주차장

사보이 호텔 사건 이후 기세를 올리고 있던 범호남파의 두목 오종철은 부하들간에 다툼이 커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자신의 경호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신상사파 뿐만 아니라 같은 호남 건달들까지 공격했다는 소문이 거리에 돌았고 이에 오종철은 사실상 고립되기 시작했다.

깡으로 신상사를 공격하긴 했지만 이후 점점 옥죄여들어가는 반격과 경찰의 수사에 오종철과 범호남파 식구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엔 오종철을 지지한 정학모도 슬슬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송태준 계열의 호남 식구들까지 함께 공격을 당하자 오종철과는 거리를 벌리고 싶어했다.



(나중에 정학모는 정재계쪽에 연줄을 대 김대중 정권 시절 한끗발을 날리게 된다. 2003년 김대중 아들 김홍일과의 비리혐의(나라종금 사건)으로 구속 수감 되기도 하였다.)


선배들의 지시를 받은 김태촌은 자기 부하들과 함께 오종철을 잡으러 다녔다. 그 와중에 한번 조양은과 맞닥뜨린적도 있지만 옛날 소년원 시절의 안면때문에 그냥 놓아주었다고 한다. 이는 김태촌 회고 기사나 조양은 자서전에도 둘 다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쫒고 쫒기는 추적이 계속 되던 날 드디어 1976년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에서 오종철과 그의 보디가드들을 발견하는데 성공 했다.


김태촌의 회고기사를 보자. (출처: 시사저널)

"특공대원의 총지휘자는 이 아무개였다. 최 아무개, 김 아무개, 오 아무개, 김 아무개 등 7~8명이 각각 대검, 도끼, 낫, 쇠파이프, 야구방망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오선배를 정확히 가르쳐 달라고 했다. 친구가 오선배를 지적하자 나는 이 아무개에게 다시 오선배를 일러준 뒤 작업을 마치면 흩어져 장충단공원 앞 태극당으로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무교동 극장식 술집 엠파이어 주차장 앞 인도에서 나와 김성광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선배와 그 직계 후배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 동생들은 순간적으로, 정확히 작업을 실시했다. 피가 솟구치고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구경꾼까지 아수라장이었다. 대검·도끼·낫으로 오선배의 하체가 난자당하고 있었다. 보디가드들은 오종철 두목을 그대로 두고 도주했다. 처음에는 내 동생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상대가 못 되었다."


오종철의 회고기사를 보면 그때 낫+대검(아마도 회칼일듯)+각목으로 무장한 김태촌의 부하들이 급습해서 자기 보디들을 제압하여 쫒아보내고 자신을 구타하여 넘어뜨린 뒤 하반신을 난자했다고 한다.

왜 하반신을 난자하느냐? 하반신을 건드리면 대동맥이 파열되면 그냥 죽는거고 운좋게 살아도 불구가 되기 때문에 사실상 은퇴된 것이나 다름 없게 되고 또 만에 하나 잡히더라도 하반신 난자는 살인죄에서 좀 경감을 받을 수 있기 떄문에 하반신을 작업한다고 알려저 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서울 바닥에 김태촌의 이름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다.

오종철은 간신히 목숨을 건저 병원으로 급히 이송됬지만 그만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런 몸과 정신의 충격으론 결국 조직을 추스리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직원들도 형님이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기가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상처를 치료하고 검찰에 자수, 조직세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범호남파의 두목은 조양은이 물려 받으면서 사실상 "양은이파"를 결성하게 된다.



(손 안대고 코 푼 신상사 신상현)

2. 조양은과 김태촌의 3년 전쟁

이 후 두목자리를 승계한 조양은은 분노에 치를 떨며 보복을 다짐했다. 76년 4월 서울 태평로 아시아 호텔에서 김태촌의 부하들과 집단 난투극까지 벌였지만 오히려 경찰의 주의만 끌 뿐이었고 조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김태촌과 조양은은 서로의 부하들을 공격하며 수시로 칼부림을 해댔다.


"김씨측이 조씨측을 친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이 퍼시픽호텔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씨측이 퍼시픽호텔에 있던 박모씨 등 조씨의 부하들을 급습해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김씨의 옛 아우는 “당시는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 (조양은 식구들과) 만나면 싸울 때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살았다.


김씨측이 당한 대표적인 사건은 최모씨가 칼을 맞은 사건이다. 당시 조양은씨와 부하들은 모 호텔 커피숍에 김씨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커피숍에는 김씨 대신 최씨가 앉아 있었다. 조씨의 아우들은 이날 최씨에게 10여 차례 칼을 ‘먹였다’. 그밖에 서로의 아지트를 공격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출처 신동아 기사)

이때 당시의 전쟁을 조양은은 자서전에 3년전쟁이라 불렀다.



허나, 이제 갓 조직을 물려받은 조양은으로서는 깡만으로는 신상사와 계속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피신과 사투를 반복하던 조양은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조창조의 중재로 신상사에게 사죄하고 화해를 하게 된다.
이후 조양은은 재기를 다짐하며 일단 광주로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훗날 강북과 강남의 유흥가에 세력을 다시 펼치기로 하였다.



(조창조의 중재로 신상사와 조양은은 화해를 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조양은은 자기 선배를 담근 김태촌은 용서 할 수 없었다.)
한편 이때쯤 김태촌은 오종철 작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난 뒤 오기준 같은 선배들에게 서울 조직을 맞기고 잠시 광주로 피신해 있었다.
거기서 조용히 있는게 아니고 또 신민당 각목사건을 주도하며 정치건달로서의 입지도 다질려고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5살이었다.



(신민당 각목사건. 이철승 의원의 사주로 김영삼 의원을 공격했다. 김영삼은 여기서 피해 도망가다가 2층에서 떨어저서 다리가 부러지고 만다.)
77년 결국 김태촌은 폭력혐의로 감옥에 들어가면서 조양은과의 갈등은 잠시 봉합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전쟁으로 광주로 피신해있던 조양은 역시 결국 붙들려 서울구치소로 압송되었고 김태촌은 거의 같은 시기 폭력혐의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로 끌려오게 된것이다. 

거기서 일단 그 둘은 화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화해는 말뿐에 불과했다. 

일단 조양은은 김태촌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선배를 칼부림해서 은퇴시킨것도 모자라 무교동 까지 빼앗기는 원인이 되었으니 김태촌에 대한 증오는 내심으로는 매우 컷던 것이다.
이후 둘의 갈등은 나중에 상경한 OB파의 이동재까지 더해 80년대 치열한 강남 쟁탈전으로 비화된다. 



(김태촌과 이동재의 젊을 때 모습)

3. 양은이파와 서방파의 서울 장악 그리고 OB 파 이동재의 등장

아무튼 조양은은 78년에 석방되고 김태촌은 79년에 석방된다.(75년에 전쟁터지고 78년에 마무리 했으니 조양은은 3년전쟁이라 부른것이다.)
이후 둘은 서울에서 각자 조직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조양은은 호텔 나이트클럽들을 하나둘씩 접수하며 나와바리를 다지고 김태촌 역시 서방파 선후배들을 챙기면서 오기준이나 박종선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보스급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또 이때쯤 개발이 진척되어 슬슬 유흥가도 생기고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 많아지기 시작했던 "강남" 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때에 광주에서 또 다른 인물인 이동재가 등장하였다.
OB 파는 광주의 양대조직인 충장로파와 대호파가 있었는데 바로 대호파 계열로 이동재가 조직원들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해 왔다.
그들은 광주의 주먹건달로 유명한 전희장의 동생들이었던 것이다. (전희장은 송태준과 거의 동급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여러 비화가 있는데 일설에는 대호파의 내분으로 이동재와 동생들이 사실상 "쫒겨난 것" 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조양은과 김태촌은 석방되서 막 조직을 다스리려는 찰나... 그만 그들의 운명을 가르는 한 사건이 터진다.



바로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고 일어나 나라를 뒤엎은 것.
이후 바로 신군부는 사회정화의 명목으로 깡패들을 전국에서 잡기 시작했다. 
(다만 조 - 김은 삼청 교육대는 아니고 그냥 감옥으로 끌려간 것이다.)

이때쯤 양은이파는 내부분열을 겪고 있었는데 (조양은의 입장에서) 배신자 박모씨를 조양은이 동생을 시켜 린치를 가한 사건이 있었다. 또 순천시민파 내부분쟁에서 자기 동생들을 보내 개입하다가 그만 경찰의 주목을 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조양은은 체포되었다.
거기서 조양은은 무려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사실상 직접적으로 조직생활은 포기하고 빵에서 동생들을 시켜 조직을 관리하게 된다. 김태촌도 풀려난지 얼마 안되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고 6년뒤인 86년에 출소하게 된다. 그 틈을 노려 이동재가 서울을 장악한 것이다.
이동재는 우선 이정재 후계자인 오따 정종원에게 접근하여 선배들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강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한 박영장이나 지만천 같은 김태촌이 모시던 호남선배들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사실상 전국구로 80년대 중반에 서울에 이름을 떨첬다.



맨 왼쪽이 정종원 - 신상사와 더불어 현존 전국구 건달 중 최고 어른이다. 

가운데가 故 조일환, 오른쪽 흰양복이 故 김동회 -야인시대 나온 김두한 친구)

김태촌은 감옥에서 있는 동안 자신의 조직이 많이 약해진걸 알고 있었다. 김태촌의 부하들까지 이동재의 부하들에게 린치당해 큰 부상을 입는 일이 생겼다. 이동재의 위세는 대단해서 조양은 동생들이나 김태촌 동생들이나 모두 건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양은은 감옥에 있으니 문제가 아니지만 86년에 출소한 김태촌의 입장은 달랐다. 처음엔 호남선배들의 부탁으로 이동재와 별 큰 갈등이 없었으나 계속된 부하들간의 충돌로 인해 양측의 갈등은 금방 폭발하게 된 것이다.




1. 석방..그리고 격동의 1986년

1986년 1월, 김태촌이 석방 됐다. 운이 좋았다. 

조양은은 15년이나 받았는데 비해 계엄령이 해제돼 항소심 재판이 민간법원에서 열리게 된 것.
2심 재판부는 5년 6개월을 선고했다. 조양은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 비해 김태촌은 다시 조직을 추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빵에서 막 나오고 보니 조직은 엉망이었다.
이동재의 OB 파는 이미 세력을 충실히 구축해 여러 선배들의 비호를 받으며 이태원과 강남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전국구로 대접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동재 식구들은 조양은과 김태촌 식구들을 수시로 공격을 가하며 제압을 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김태촌이 석방되기 1년전 그의 절친 이석권마저 이권문제로 다투다가 칼침을 먹여 중상을 입힌 상태였다. 이석권은 목숨은 건젔지만 큰 상해를 입었다.



하지만 김태촌은 당장 보복은 하려 하지 않았다. 석방된지 얼마 안됬고 일단 조직을 추스리는게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또 그의 회고기사를 보면 이석권이 김태촌 옥바라지를 제대로 안해서 서운한 감정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동재에 붙은 호남선배들인 박영장이나 지만천 역시 이동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건은 한 문갑 때문에 벌어젔다. 

김태촌의 회고 기사를 보자.

"1986년 6월 어느 날. 김성광이 운영하던 파레스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훗날 로비의 귀재가 되는 파친코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 사장의 동생 정덕일 사장을 만났다. 나와 김성광, 정덕일 사장이 파레스호텔 나이트클럽 옆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듯한 사람이 찾아왔다. 눈부위가 시퍼렇게 부어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었고 얼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코피를 흘린 자국도 있었다.
권광일이었다. 서울 도쿄호텔 나이트클럽과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그는 당시 김성광이 영업부장으로 있는 파레스호텔에서 서울 제1의 미인 50여 명을 호스테스로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권광일이 저 모양으로 구타당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취객에게 행패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곧 의혹이 생겼다. 도박판 운영 문제로 오비파는 내 친구 이석권을 난자하고서도 버젓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석권에 이어 김성광에게까지 도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권광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숨을 멎도록 만들었다. 오비파 조직원들에게 폭행당했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정종원 선배가 구해 놓으라고 한 문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갑을 정선배에게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비파 조직원들이 권광일을 찾아와 구타했다는 것이다. 오비파가 서방파 구역을 침범한 것이다. 김성광은 나의 친구이며, 서방파 핵심 조직원이며, 또한 파레스호텔 나이트클럽 총책임자이다. 오비파 조직원들이 권광일을 구타한 것은 김성광을 폭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김성광을 무시한 것만 아니라 김태촌을 무시한 것이다. "
(출처 : 시사저널)

김태촌의 분노는 폭발했다. 이석권까지 칼에 맞고 참았는데 더 이상 참다가는 호구로 보일게 뻔했다. 주먹세계에서 한번 약하게 보이면 끝장이었다. 즉시 서방파 식구들에게 비상소집을 때렸다.
그 후 이석권, 김성광과 함께 작전을 짜서 이동재와 OB파를 섬멸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했다. 
파레스호텔 특실에 방을 잡아두고 이동재의 아지트를 습격한 다음 그를 납치해서 오비파를 해체하고 영원히 은퇴하겠다는 각서를 받겠다는것 이었다. 이를 위해 동생들을 총 동원했다. 훗날 "맘보" 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오재홍도 여기에 참가 했다.



(나중에 맘보 오재홍은 김승연 회장 아들 보복 사건에 관련되어 언론에 오르락 거리고, 서진룸살롱 사건에서 조직원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우선 김태촌은 정종원 선배한테 처들어가서 이동재와 오비파를 섬멸하기로 했으니 다시는 그와 연관되지 말라고 "정중히" 말했다고 한다. 종원은 그에게 전쟁을 하지 말라고 만류 했으나 김태촌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쩔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왼쪽이 정종원, 오른쪽이 조일환)

또 이동재를 비호하는 호남선배들도 일일히 만나 전쟁이 시작됬으니 그를 비호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쯤이면 선전포고는 끝낸 셈이었다.



(둘의 갈등은 1986년 전쟁으로 폭발한다.)

그 후 특공대 50여명을 데리고 이동재의 본거지로 처들어갔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었다.
먼저 오재홍에게 10명의 부하들을 주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찰들이 출동하면 막으라고 문앞에 배치해 두었다. 그리고 이석권과 김성광, 이양재 등과 함께 나머지 부하들을 이끌고 곧장 이동재의 사무실로 처들어갔다. 이동재의 부하들이 막았지만 격렬한 사투 끝에 제압하고 사무실로 돌입하는 순간 이었다.
그때였다.
순간 "와!! 다죽여!" 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출입구를 지켜야할 오재홍이 흉기를 들며 돌입해 온 것이다.
김태촌은 이를 출동한 형사 기동대와 싸우는 오재홍의 신호로 착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영웅심에 빠진 오재홍의 단독 기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라이벌인 이양재 등이 이동재를 제거한 영웅이 되고 자신은 문앞이나 지켜야 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명령없이 단독행동을 한 것이다. 

당시의 회고기사를 보자.
"영웅심에 사로잡힌 오재홍과 후배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재홍이 착각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필생의 라이벌인 이양재에게 이동재를 납치하게 해 영웅이 되게 하고, 자신은 건물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한 것을 억울해 한 것이다. 그가 직접 이동재를 납치하거나 이동재를 난자하려고 한 것이다. 자칫 오재홍의 영웅심에 이동재와 오비파 조직원들이 무작정 난자당할 것 같았다. 나는 오재홍과 후배들에게 즉시 원 위치로 돌아가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눈이 뒤집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육탄으로 계단 밑으로 밀고 내려갔다. 내가 워낙 강하게 나가자 오재홍과 후배들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오재홍은 컥컥 울며 내게 항의했다.
그때였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형사기동대가 출동한 것이다. 건물 직원이 조직간 패싸움이 일어났다고 신고한 모양이었다. 이제 이동재 납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형사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우리를 검거할 수가 없었다. 조직원 수십 명이 무기를 휘두르자 형사들도 접근하지 못했다. 우리들은 시동을 걸어둔 승용차에 번개같이 올라타고 자리를 떴다. 이동재의 간담은 서늘했겠지만 이게 무슨 꼴인가. 이동재를 납치해 혈서를 받으려고 얻어둔 파레스호텔 특실로 돌아와 우리는 한숨만 쉬고 있었다. 이제 이동재도 전면전에 대비할 것이다."

(출처 : 시사저널)

결국 김태촌은 간발의 차이로 이동재를 놓치고 만다. 
그 후 양측에 전쟁의 분위기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흘렀을때 뜻밖에 김태촌에 한사람, 오종철이 찾아온다. 



(김태촌을 만나러 온 오종철)

그는 예전 김태촌에게 칼을 맞아 은퇴한 상태였지만 김태촌과 이동재의 전쟁 소식을 듣고 중재를 위해 불구의 몸으로 김태촌을 찾아온 것이다. 김태촌은 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오종철의 중재요구는 처음엔 거절했다.
도박장 개장 문제로 이석권을 난자하고 김성광의 부하들을 두들겨 팼으니 용서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오종철은 간곡히 불구의 몸으로 찾아온 선배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동재와 일단 독대라도 해보라고 권유했다. 결국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김태촌과 이동재는 서로 만나 독대를 하기에 이른다.
회담 분위기는 딱딱했다. 이동재는 오따 정종원 선배의 문갑 문제에 대해선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그러나 김태촌은 변명은 필요 없다고 하고 둘 중 하나가 섬멸될때까지 전쟁을 하자고 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이동재는 김태촌과 전쟁을 벌일 의사가 별로 없었다. 서로간에 크게 전쟁을 벌이면 혼란한 시국에 둘 다에게 피해를 줄께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석권을 난자한 부하들과 김성광의 부하를 두들겨팬 부하를 내놓을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김태촌은 이에 상당히 놀랐다. 자존심을 앞세우며 싸울줄 알았는데 이동재는 한발빼며 타협을 한 것이다.
결국 김태촌에게 야구방망이로 이동재의 부하들이 얻어맞는 것으로 화해는 성립되었다.
오비파와 서방파의 항쟁은 종식되었다. 오종철의 중재로 앞으로는 형제같이 지내기로 하였다. 그후 큰 축구대회를 열어 3대 패밀리의 단합을 다지기로 하였다. 김태촌의 기세는 1986년 하늘을 찔렀다.

2. 축구대회와 박남용 검사 그리고 뉴송도 호텔 사건

당시 조양은은 아직도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양은이파는 그의 오른팔인 백영두가 지휘하고 있었다.
김태촌은 백영두에게 같이 큰 축구대회를 열어 갈등을 종식시키고 단합행사를 하자고 하였다. 그도 찬성하였다. 이후 그는 교도소 시절 친분이 있었던 박남용 검사에게 의뢰해서 여러 정계 인사들과 주먹계 선후배들을 모두 불러모아 축구대회를 열었다. 
박남용 검사는 훗날 김태촌의 이름이 세상에 오르내리게 되는 뉴송도호텔 사장 황익수 살인교사 사건에 연관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축구대회에 참석한 인사들 중에는 유명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정재 동대문 사단 계열로 낙화유수란 별칭으로 유명했던 김태련 - 사진 가운데)



(이정재 이천파의 후계자인 유지광)



(맨 왼쪽 정종원도 참가했고)



(명동 신상사 신상현도 물론 참가했다.)

그 외 전희장,송태준,이용 같은 호남 건달들과 박영장, 정학모, 유명화도 참가했다고 한다.
그렇게 축구대회도 성대히 끝마첬고 모든게 잘 되가는듯 했다.
그러나 김태촌의 운명은 또 한번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로 언론에 떠들석하게 알려진 뉴송도호텔 살인교사 사건 때문이었다.

3. 뉴송도 호텔 사건과 또다시 구속되다.

원래 사건의 주모자 박남용 검사는 김태촌이 교도소에 있을때 그를 굳이 찾아가 안면을 터놓은 상태였다.
그 후 김태촌이 석방되자 형,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게 됬는데 이때 그가 뉴송도호텔 사장 황익수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제대로 못받았다라고 도와달라고 김태촌에게 부탁하게 된다.
이에 김태촌은 동생들을 시켜 황익수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데 성공하는데 이에 황익수는 앙심을 품고 박남용 검사를 비난하는 투서를 검찰에 보내게 된다. 이에 박남용 검사는 큰 고난을 겪게 되고 결국 김태촌에게 황익수를 죽여달라는 살인교사를 하게 이른다.
처음에 김태촌은 돈 몇푼에 살인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허나 박남용 검사가 뉴송도 호텔의 지분을 준다고 함과 동시에 축구대회를 범죄조직 재건에 이용했다는 것으로 김태촌에게 다시 감옥으로 보낼 수 있다는 협박을 함에 따라 결국 7가지 조건과 혈서를 쓰고 살인교사를 받게 된다.
그 조건은 작업을 한 동생들을 지켜달라는 것이고 혈서는 한자로 信義 라고 써서 서로 한장씩 나눠 갖는 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도 국과수에 혈흔 감정을 하면 누군지 다 들통이 나니 배신하는 행위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김태촌은 끝끝내 황익수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결국 오더를 내려 다리 한짝만 작업을 하게 하고 목에 상처를 입히라는 지시를 내린다. 기술 부족으로 죽이는데 실패했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던 것이다.



뉴송도 호텔 사건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원래 이 사건은 박검사와 김태촌 부하들의 자수로 적당히 묻힐 뻔 했으나 문제는 비슷한 시기의 김태촌의 부하 맘보 오재흥의 부하들이 서진룸살롱에서 술을 마시다가 목포 유도부인 장진석 패거리와 시비를 붙어서 칼부림을 해 무려 4명이 죽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서울 목포파라는데 나중에 나온 기사로는 실제로는 그냥 유도부 패거리였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은 언론에 룸살롱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조폭간의 전쟁으로 과대포장돼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좋던 실든 맘보 오재흥의 형님은 김태촌이었으므로 그에게도 수사의 방향이 쏠리게 된 것. 또 이때를 틈타서 황익수는 재빨리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을 상해케 한자들이 박남용 검사의 사주를 받은 김태촌 패거리란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

결국 김태촌은 부산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칠성파 두목 이강환의 도움을 얻어 다시 제주도로 도피하기에 이른다. 박남용 검사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김태촌을 보호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부산의 전국구 두목 이강환 - 사진 가운데)

그러나 수사망은 계속 좁혀 들어왔고 결국 김태촌은 목포에서 검찰에 자수함으로서 출소한지 1년도 안되 다시 감옥으로 직행하고 만다. 거기서 다시 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기에 이른다.

4.89년 형집행정지 재석방과 범서방파 결성

그러나 김태촌에겐 그동안 쌓아놓은 정재계의 인맥들이 있었다. 조폭과 공생하던 5공-6공 인사들은 김태촌의 든든한 백이 됬던 것이다. 또 이 때쯤 친분을 다저놓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 와의 친분도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조용기 목사)

결국 김태촌은 폐암발병을 이유로 3년만에 형 집행정지로 1989년 석방되기에 이른다.



3년간 빵살이를 하다 나온 김태촌의 입장은 또 잘 풀려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OB 파의 이동재가 조양은과의 갈등으로 순천시민파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뒤 은퇴한 것이다.
화해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껄끄러웠던 이동재는 조양은과의 갈등은 좋게 해결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고 미국으로 도피했다.
원래 순천시민파는 조양은이 시민파와 순천중앙파와의 갈등 및 내부분열에서 시민파 두목 오철묵을 적극적으로 도와 조양은과 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조직이었다. OB 파가 양은이파의 세력권을 자꾸 침탈하고 조직원에게 칼부림을 해대자 감옥에 있던 조양은은 격분한 나머지 순천시민파에게 의뢰를 해 이동재를 작업한 것이다. 김태촌으로서는 어부지리나 다름 없었다. 어차피 조양은은 감옥에 있고 이동재는 은퇴했으니 사실상 김태촌의 독주 시대가 이뤄진 것이다.
이에 고무된 김태촌은 전국의 동생들을 다 불러모아 약 300명 규모의 기도회를 가장한 조직 단합대회를 연다. 여기서 신우회를 결성했는데 바로 오늘날 이것이 범(凡) 서방파로 불리게 된다.



김태촌에겐 뭐든게 잘 풀리는듯 보였다. 따른 적수도 없겠다, 빽으로 살인교사도 3년만에 풀려나왔겠다..거칠게 없었다. 또 당시 막 인기를 끌고 있던 빠징코와 슬롯머신 사업에 뛰어들어서 자금을 확보하고 일부는 현 정부 실세에 상납하며 든든한 백을 얻을 수 있었다.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 카지노 대부 파라다이스 그룹 회장 전낙원 과의 유대도 다지면서 서울의 돈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슬롯머신의 대부 정덕진 - 훗날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의 주역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고 스타로 떠오른게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파라다이스 그룹 故전낙원 회장)

게다가 정치계도 변하기 시작해 감옥에 있을동안 무시무시했던 군사정권도 사라지고 직선제로 선출된 "민주주의" 정부가 성립된 것이다.


['물'태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안심하던 김태촌의 운명은 또다시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로 만만해 보이던 이 남자 보통사람 노태우 때문이었다.


1.슬롯머신의 대부 정덕진과 카지노 대부 전낙원과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다.




(슬롯머신의 대부 정덕진, 전국 오락실을 다 쥐어 잡고 있었다.)

1989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온 김태촌은 바로 슬롯머신의 대부 정덕진과 손잡고 오락실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시기 노태우 정부 실세들의 비호를 받은 오락실 사업은 번창 일로 였다.
마치 노무현 정부 시절 Sea story 마냥 투자금만 대면 돈이 뻥튀기 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그 이익금 일부는 정부 실세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당연히 김태촌 같은 조폭들에겐 그러한 빽은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슬롯머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근데 이러한 카지노 사업이 번창일로가 되면서 반발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바로 전낙원 회장이 이끄는 카지노 재벌 파라다이스 그룹이었다.



(故 전낙원 회장 - 카지노업계의 대부로 그의 인생사 역시 파란만장 했다.)

워커힐 호텔 카지노를 경영하던 전낙원 회장은 역시 여러 건달조직들로부터 '큰형님' 대접 받으면서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태촌과도 처음에는 유대를 다지며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카지노는 명목상으로 내국인 출입 불가였지만 소위 돈있고 힘있는 친구들은 여러 편법을 써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며 놀 수 있었다. 돈들고 온다는데 막을 것도 없는 노릇이고 전 회장의 사업은 번창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근데 새로운 라이벌 정덕진이 등장해 일본 빠찡코를 모방한 사설 오락실 사업을 전개하자 파라다이스 그룹의 이익은 크게 줄기 시작했다.
당연히 전낙원 회장이나 그를 추종하며 떡고물을 받아먹던 건달들에게 있어선 이건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거기다 더해 1989년 정덕진은 전낙원 회장이 운영하던 제주도 칼 호텔의 카지노를 재계의 안면이 넓은 인물인 임부박씨를 동원해 접수하는데 성공 한다. 오락실 이권에 만족못하고 카지노까지 치고 들어오자 전낙원 회장의 분노는 폭발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버릇없는 정덕진을 혼내주겠다!" 라고 주변에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정덕진과 전낙원의 갈등은 결국 양측의 치열한 전쟁으로 발전해 서로를 경찰에 밀고하거나 휘하의 조직들을 동원해서 사업을 방해하고 장악하는데 힘을 쓰게 된다.



(바로 이것이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요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드라마를 보면 카지노와 슬롯머신 이권을 두고 깡패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김태촌은 그전부터 이미 안면이 있었던 정덕진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한다. 애초에 정덕진의 동생 정덕일이 파레스호텔에서 빠찡코 사업을 하고 있을때 파레스 호텔 나이트클럽을 경영하던 김태촌은 부하 김성광을 보내 그를 돕게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정덕진은 김태촌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옥바라지를 해주고 그가 형집행정지로 석방 될 수 있게 힘을 써줬다. 당연히 은혜(?)를 갚는건 당연지사한 일이었다.)



(정덕진과 전낙원의 전쟁은 한국 주먹세계마저 뒤 흔들어놓는다.)

전쟁의 스케일은 날이 갈수록 커젔다.
이제 단순히 깡패들간의 이권 다툼 정도가 아니었다.

정덕진이 안기부 기획실장 엄삼탁, 황태자 박철언 에 접근 에 커넥션을 형성하자 전낙원 회장은 워커힐 호텔 소유주인 선경그룹 회장 최종현을 동원한다.



(왼쪽이 故 엄삼탁, 오른쪽이 노태우 정권 실세 박철언)



(선경그룹 회장 故 최종현, 현 SK 그룹 회장 최태원의 아버지이다.)



(애초에 같은 장소에서 사업을 하는 관계인대다가 선경과 전낙원 회장은 매우 친한 관계 였다.)

근데 문제는 바로 이 최종현 회장과 노태우 대통령은 사돈 관계 였던 것이다.
애초에 정덕진이 넘기엔 전낙원 회장의 탄탄한 인맥-커넥션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던 것이다.
김태촌은 당시 정덕진의 지시로 워커힐 호텔 카지노로 처들어가서 깽판을 내놓고 돈을 요구하며 갖은 행패를 부리며 장사를 방해했다. 덩달아 워커힐 호텔의 장사도 안되는건 당연한 일이었고 최종현 회장의 심기도 건드리고 말았다. 
결국 국세청과 안기부의 조사가 정덕진에게 쏟아졌다. 1990년 결국 믿었던 빽인 엄삼탁마저 정덕진에게 찾아와서 "당신이 살 길은 전 회장과 화해하는 것 뿐" 이란 말까지 듣게 된다.
정덕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정덕진은 미국으로 도피하고 동생 정덕일이 전낙원 회장에게 굴욕적인 사죄와 함께 앞으로 다시는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지 않겠다라는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김태촌의 가장 큰 빽이 하루 아침에 소멸한 것이다.


(물론 정덕진도 전낙원도 1993년 정권이 바뀌자 김영삼 대통령의 직격을 맞고 둘다 작살난다.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가 스타로 등극한 그 슬롯머신 사건이었다.)

2. 범죄와의 전쟁 개시되다.

아무튼 최종현 회장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가서 깡패들이 설치고 있으니 도저히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직보한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결단을 내려 전국의 각종 흉악범죄 및 조직범죄와 전쟁을 선포하게 되니 바로 이것이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말하는 것처럼 삼청교육대는 잔챙이만 잡았지만 이번 범죄와의 전쟁은 확실히 틀렸다.)
타격은 엄청났다. 각지의 전국구급 두목들이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체포되거나 사업을 중단하고 은신하기에 이른다.



(줄줄히 굴비엮이듯 붙들려 가는 두목들과 조직원들)



(성공한 반달로 잘 나가는 수원의 전국구 최창식도 구속된다.)
물론 이 양반은 나중에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조직생활은 예전에 손떼고 반달노릇 오래 해서 요리조리 잘 피해나간것.



(후에 씨름협회 회장도 하고 지금도 성공한 체육인 흉내를 잘 내고 있다. 지금도 수원 3대조직 남문파,북문파,역전파의 큰 형님 대접 받고 있다)



(대전 진술이파 두목 김진술과 순천시민파 두목 오철묵)



(김태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주도 칼 호텔 접수건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하여 긴급체포 된다.)



(호남 건달의 대부 박영장도 체포 구속 되기에 이른다. 물론 나중에 집유로 풀려나온다.)



(부산의 전국구 칠성파 두목 이강환도 체포, 20세기파 두목 안용섭도 체포된다.) 



(당시 몇년전 이강환은 오사카의 지정폭력단 사카우메 구미의 2차단체 카나야마 구미와 교다이 사카스키(형제배)를 맺어서 범죄와의 전쟁 이전부터 관심대상이였다.
이 의식은 김태촌이나 최창식을 비롯한 한국의 거물급 두목들을 총동원해서 참가했는데 (나중에 강호동도 멋모르고 끌려가 훗날 종편에 나오기도 한 원인이 됐다. 두목 카나야마 고사부로는 재일교포로 한국명은 김재학이었는데 당시는 2차 단체 두목이었지만 지금은 사카우메 구미의 두목이 되었다.)
사카우메 구미는 그렇게 큰 조직은 아니지만 지정폭력단으로 일본 최대의 폭력단 야마구치 구미와도 관계가 있으며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다.



물론 이러한 체포는 실적을 위주로한 경찰과 검찰의 급급함도 있어 몇몇 거물급들을 제외하고 상당수는 그냥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허나 한국의 건달 조직들에게 전체적으로 타격을 입힌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김태촌은 이번 체포에서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정덕진도 날아간 상태였으니 뒤를 받처줄 빽이 아무도 없었던 것.
치열한 재판 공방끝에 결국 징역 10년에 보호감호 10년을 받고 장기복역하게 되고 사실상 범 서방파를 관리하는것은 끝장나고 조직세계에서도 반 은퇴하게 된다.

3.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

김태촌은 감옥에서 지병이었던 폐암이 재발하여 사실상 조직세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
전 가수 이 모씨와 옥중결혼식을 올리기도 했고 15년간 복역끝에 보호감호제가 폐지되면서 2005년 석방된다.



(생일축하연에서 부인 이씨와 노래를 부르는 김태촌)

그후 권상우 협박 사건으로 또 한번 언론에 나오기도 했지만 



이 건이나 기업협박건은 결국 흐지부지 하게 된다.

그리고 김태촌은 병마에 쌓여 2013년 64세를 일기로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무리 지었다.


http://www.ilbe.com/601778670

http://www.ilbe.com/6068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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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lbe.com/617868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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